ㆍ주 관 : 열두달장독대 Academy평생교육원 ( 이성규 원장) / 열두달장독대 양산지부 : 박미영지부장 / 문승희 치유전문가
ㆍ기 간 : 2024.11.08~11.29(금) 총 10회(매주 월수금,)
ㆍ참여강사 : 이성규,문승희,최호생,정재복,박미영,김승수,윤영석,정두라,김종봉,김미란
▪원동면
◎ 연혁
면리(面里)제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태조실록》《경국대전》등의 자료에 의하면 조선 건국초기부터 시행하였다고 파악하고 있다.
지방의 군․현(郡․縣) 제도로 통치하기 위하여 시작된 것이다.
초기에는 읍 소재지를 중심으로 동ㆍ서ㆍ남ㆍ북의 사방으로 동면(東面) 서면(西面) 남면(南面) 북면(北面) 즉, 방위면(方位面)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초기 원동면은 읍의 서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서면(西面)에 속하였다.
방위면제를 실시한 흔적은《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등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원동면의 경우는 화제리 이우일(李佑一)씨가 소장하고있는 《호구장적(戶口帳籍)》에 정조 7년(1783)에는 양산군 서면 내화제리(梁山郡 西面 內花濟里)로 기록되고 정조 19년(1795)에는 양산군 하서면 내화제리(下西面 內花濟里)로 기록되었고, 순조 7년(1807)에는 양산군 하서면 내화리(內花里)로 기록되어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원동면은 조선초기의 경우 서면, 조선후기에 이르러 상서면과 하서면 등으로 불리어 졌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러나 서면이 상․하서면으로 나누어 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서면, 상․하서면 시대, 원동면 시대 순으로 그 변천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원리마을》
◎ 마을의 내력
원리(院里)마을은 면 소재지이고 면사무소를 위시한 여러 공공단체가 있으며, 경부선 원동역과 1022호 지방도가 지나는 교통외 중심지다.
원리, 삼정리(三亭里), 소원동(小院洞)등 3마을로 형성 되었다. 마을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낙동강과 영포천이 마주치는 포구(浦口)라 어촌으로 시작하였다. 《양산 읍지초(1878)》 지보에 의하면, ‘원동진에 배 1척(源洞津船一隻)과 원동관(院洞館)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수로 교통의 요지였다.
그 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고 원동역(院洞驛)이 신설됨에 따라 교통의 중심지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1926년 면사무소가 용당리에서 이전한 후로 면의 중심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리는 농경지는 없고 역을 중심으로 상가(商街)가 형성되어 한때는 2, 7일장이 열린 적도 있으나 지금은 없으지고 각종 관청이 있을 뿐이다.
삼정리(三亭里)는 원리에서 물금쪽 철도변에 위치한 정자가 있어 행인이 쉬어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고 지금은 관사마을과 이어져 있다.
또 소원동은 옹기굴과 점터가 1896년경까지 있어 당시 수로와 기차편으로 영남과 호남 일대에 반출한 곳이었으나 지금은 없다.
▪《함포마을》
◎ 마을의 내력
함포(含浦)마을은 원동면 소재지로부터 북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줄기찬 토곡산을 등에 지고 천태산을 바라보면서 아담하게 자리잡은 마을이다.
마을은 본시 함포, 신촌, 천내, 중섬 등 네 개였으나, 천내는 무자년 수해때 유실되었고, 중섬은 6.25동란 때 공비의 침투가 심해서 주민 모두가 마을을 떠났으며, 지금은 함포 본동과 신촌 등 두 마을만 형성되어 있다.
함포 본동은 송씨가 제일 먼저 정착하여 살았다고 전하나 자세한 기록이나 근거는 찾을 수 없고, 각 씨족의 족보를 살펴보면, 재령이씨가 13대, 경주최씨가 12대 세거(世居)하고 있으며, 신촌마을은 1900년경 10세대가 거주하여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명칭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나 문헌은 찾을 수 없으나, 함포라는 "포"는 포구(浦口)를 뜻할 것이니 분명히 항구를 의미하여 현재 함포 앞 함포천이 낙동강 지류임으로도 알 수 있다.
이 곳에 제일 가까운 입구 마을으므로 "함(含)자를 앞에 붙여 함포(含浦)라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신촌마을은 새로 생겼다는 의미에서 "신촌(新村)"이라 하였을 것이다.
현재는 여러 씨족이 모여 100여호에 달하는 살기 좋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당곡마을》
◎ 마을의 내력
당곡(堂谷)마을은 원동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있으며, 예전에는 집중호우에 위한 낙동강 범람으로 미곡을 생산하지 못 하여 처녀가 쌀 3말을 먹지 못하고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었으나 지금은 고소득작물인 시설하우스(딸기, 수박 등) 재배로 부촌(富村)을 이루고,영천이씨, 동래정씨, 성주이씨 등이 마을을 형성하여 왔으며,마을 앞으로 경부선 철로와 1022호 지방도가 있는데, 옛날에는 이 지방도가부산 ~ 서울간 국도였다.
그리고 철도 건널목 너머 들판 앞으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데,강가 들판에 용당 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과거에는 원동면 청사가 여기에있었고 또한 가야진사가 현존하고 있다.
당곡마을에 소속되어 있는 비석곡은 옛날 고을 원님이 지나가다가 여기에서 쉬어 갔다 하며 비석을 세워 원님이 쉬어간 것을 증표하였기 때문에 비석곡이라고 칭하였다 한다.
가야진사는 당곡마을 이장백씨와 정춘근씨가 주축이 되어 매년 제사를모시고 오던중 경남민속문화재로 지정되면서부터는 양산시 문화원이 주관하여 제향을 받들고 있다. 그리고 철도가 개설된 이후부터 건널목이 없어서 등짐(지게)으로 수확물을 운반하였기 때문에 불편이 막심하였는데,1970년대에 이르러 당시 양산군 출신 국회의원 신상우씨의 활약으로 오랜주민의 숙원사업이었던 당곡, 중리 및 범서 철도 건널목 3곳을설치함으로써 영농 기계화 사업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신곡마을》
◎ 마을의 내력
신곡(新谷)마을은 1979년 7월 1일 당곡마을에서 분동되면서 "새로운 마을"이라고 "신곡(新谷)"이라 칭하고 있다.
주위가 침수지이며, 옛부터 기와를 구워내던 마을로서 영산신씨, 성주이씨,경주최씨 등이 마을을 형성하여 왔다.
오의정의 전설이 있으며, 마을 뒤 큰 바위를 장사 같다하여 장사바위라 일컫고 있고, 임진란 때 간이승병 훈련장이었던 천태산이 마을을 둘러싸고,천태정사와 수자굴 바위가 계곡폭포 뒤에 위치하고 있어 마을의 큰 자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6.25 사변시 천태산 폭포 주변이 공비들의 근거지였던 흔적이 일부 바위 밑에 남아 있으며, 마을 앞 저습지는 버려진 땅이었는데, 배광정씨를 위시하여 마을주민들의 공동노력으로 이제는 훌륭한 옥토로 변모했다.
▪《중리마을》
◎ 마을의 내력
중리(中里)마을은 원동면 소재지에서 경부선 철로를 따라 서북쪽 약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800여년전 평해황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하며, 양산군과 밀양군의 경계에 위치하였다 하여 지경마을이라 칭하기도 했다.
이 마을은 삼한시대부터 황산강(현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는 교통수단의 요충지였으며, 강변을 따라 나 있는 육로는 동래-한양(서울)간의 국도였다.
수로에는 당시 신라인이 가락국으로 통행하는 가야진사 나루가 용당리 앞에 있었고, 여기에 작원관원문에 있었는데, 그 원(院)은 남쪽 약 50m 지점에 있는 수로에서 육로로 통행하는 통행인을 감시하는 감시병(파수병)이 상주하였으므로 이 곳에 주막과 파수병의 가족이 사는 마을이 생겨 그 마을 이름을 파수막마을이라 하였으며, 중리마을에 속해 있다가 그 후 다시 하주막 마을로 개칭되다가 1969년 정부시책에 의거 독가촌의 철거대책으로 마을은 형태조차 찾아 볼 수 없게 되고 중리마을은 독립마을이 되었다.
▪《선장마을》
◎ 마을의 내력
선장(仙庄)마을은 원동면 소재지로부터 북쪽으로 4.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우리면내에서 가장 높은 토곡산 밑에 있으므로 항상 맑은 물이 흘러 내려 청정한 공기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고, 과거에는 미곡과 인삼,당귀, 청궁 등 약초 특산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였다.
약 400년전 영천이씨가 먼저 정착한 것으로 전해지며, 이후 청송심씨,경주 최씨 등이 주축을 이루며 살아왔으나 지금은 여러 성씨가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이 마을은 처음 바깥 선장골 이라 하였으며, 인근 내포마을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늘밭, 맹주검, 물바지, 사지목, 안선장골, 소태나 무골, 웃각단 등의 자연마을을 통합하여 신선이 하강한 곳이란 전설에서 마을 이름을 "선장(仙庄)"이라 하였다 한다.
이 선장마을 주민은 대부분 미곡을 주로 생산하고 있는데. 1948년 무자년의 수해로 신선들의 전설이 얽힌 귀목나무 정자도 유실되었고,심덕섭씨 가 경영하던 물레방아도 흔적없이 되었으며, 6.25동란시에는 공비들의 약탈로 많은 시달림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선장 이장 최차수씨는 이 마을에 있던 큰댁에 왔다가 공비에게 피살당하기도 한 많은 마을이었다.
그 후 이 마을 주민들은 근면, 성실과 절약하는 정신으로 재건에 힘쓴 결과 1980년대에는 원동면내에서도 대학생이 가장 많은 마을로 이름나기도 했다.
선장마을은 항상 물이 맑으므로 이 곳 선장천에는 사계절 피서객과 등산객 이 끊임없이 모여들고 있으며, 그 중 여름철에 도시민들이 가장 많이 방문한다.
선장마을에 소속되어 있는 명전마을은 선장에서 동남쪽 약 4km 지점의 고산 비탈진 곳에 위치한 조그마한 자연마을로서 추계추씨 일문이 세거(世居) 하면서 문중(門中)을 이루고 있으며, 지금도 그 후손들은 선조의 묘를 성묘하기 위하여 매년 모여들고 있다.
명전마을은 약 300년 전 청송심씨가 밀양 단장 국화전에서 반란을 피해 와서 은거하던 곳이며, 창원정씨, 문화류씨, 신안주씨 등이 모여 살다가 6.25 동란 때 는 공비들을 피해서 마을을 비워두었기 때문에 한 때는 공비들의 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각성이 모여서 평화로운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명전마을의 본명은 맹주검이라 했는데, 지금은 한자로 "명전(明田)"이라쓰고 있다.
늘밭은 선장마을에서 동북쪽으로 약 4km 지점에 위치한 고산마을이다.
임진왜란 당시 김해에 살던 김씨 노파가 애기를 업고 왜놈을 피해 정착한곳이라 전하며, 날씨가 궂으면 마을 앞산에서 산고둥이 울었다고 전하기도하고, 잡초를 주식으로 하면서 목숨을 연명하였다 하여 늘밭이라는 지명이 되었다 한다.
달성서씨가 먼저 정착하여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으며, 그 후 울산박씨, 분성배씨등이 마을을 형성하여 오다가 현재는 각 성씨가 살고있다.
▪《내포마을》
◎ 마을의 내력
내포(內浦)마을은 원동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포(浦)라는 말은 항구를 의미하는 한자니 현재 함포마을 앞 낙동강 지류의안쪽마을이었으므로 내포(內浦)라 하였으리라. 구전에 의하면 옛부터 미곡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이 목이 말라 식수를 구할 때 정수(井水)를 발견하여 목마름을 면하였으므로 이 곳을 용정천 이라 불렀으며, 양지마을에는 김해김씨가 살고, 음지마을에는 영천이 씨 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여러 씨족들이 정착하여 평화롭게 살고 있다.
▪《영포마을》
◎ 마을의 내력
영포(泳浦)마을은 원동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주로 미곡을 생산하고, 전주최씨와 연일정씨가 세거(世居)하여 왔으며, 고기가 놀며 배가 드나드는 포구(浦口)란 뜻으로 어포(魚浦)라 부르다가 하서면이원동면으로 명칭이 변경된 후 어영동(魚泳洞)의 영(泳)자와 어포(魚浦)의 포(浦)자를 따서 영포라 칭하였다.
한편 국가보물 제1120호(92.1.15)의 신흥사가 가까이 있고, 이 마을에서는한지를 생산하여 나라에 상납해 오다가 모든 여건이 미흡하여 한지생산을중단하였다가, 그 후 마을 주민 정인관씨(정연식의 부(父))에 의해서 다시시작되었고 그 뒤를 이어 윤경수씨에 의해서 60년대까지 계속 생산되어왔다 한다.
그리고 영포마을 입구에 있는 솔밭 숲은 옛부터 영포마을 보호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어영마을》
◎ 마을의 내력
어영(魚泳)마을은 원동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9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난을 피하여 김녕김씨, 김해김씨가 이 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 후 함안조씨, 무안박씨, 안동김씨, 전의이씨, 파평윤씨,진주강씨에 의해서 현재까지 이어져 왔고, 옛날에는 배천량, 대천량,닥천량으로 도합 삼천량의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 한다.
그리고 본 마을은 함포, 내포, 영포의 바다의 포구보다 상류지점에위치하므로 물이 맑고 많은 물고기가 헤엄치며 노닌다하여 어영(魚泳)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어영마을 입구 길목 양쪽에 각각 바위가 서 있는데, 마을방향으로 좌측은 붓돌바위, 우측은 두꺼비바위라 불리고 있으며, 이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수호신이라 여기고 있다 한다.
이 수호신 바위로 인해 임진왜란과 6.25당시 단 한 명의 피해자도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 마을에서 부장검사와 부군수가 배출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의 성품은 온순하면서 이웃간의 정이 두터워 살기 좋은 마을로 손꼽히고 있다.
▪《대리마을》
◎ 마을의 내력
대리(大里)마을은 원동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1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약 400년전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하여 살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그 지역적 여건을 고려할 때 밀양 단장면에서 하천을 따라 배내골로 언양까지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하고 넓은 들판이 있는 곳이라 그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 곳에는 김해김 씨 와 청도김 씨 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옛부터 『미곡』을 생산하고 영세한 『목축업』으로 생계를 영위해 왔다.
현재는 관광인구의 출입이 많아 음식점, 민박, 축산업, 무공해 농산물 재배 등으로날로 발전하는 마을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당초 대리마을은 고점 마을과 금천 마을 등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었으나, 6,25동란으로 인해 마을이 일시 소실, 휴전과 동시 밀양 등지에서 이주해 온 주민들로 인하여 현재 이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선리》
1. 마을의 내력
선리(善里)마을은 원동면 소재지에서 북쪽 1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언양배내와 접경 지역이다. 중리(中里), 장선리 두 마을로 형성 되었다.
약 400년전 임진왜란 당시 전국 각지 피난민들이 이주하여 와서 마을을 형성 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장선동과 중선동을 병합하여 선리라 칭하게 되었으며, 이 곳에 나주정씨와 청도김씨, 김년김씨가 주축을 이루고 옛부터 미곡를 생산하고 영세 목축업으로 생활을 영위하여 왔다.
당초의 명칭은 북으로 장선마을과 남으로 대리마을의 중간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중리 라고 불렀으나, 6.25동란으로 인하여 전 마을이 소실되고, 그 후 휴전과 동시에 밀양등지에서 이주해 온 주민들로 인하여 현재의 선리 마을을 형성하고 있으며, 자연 마을은 본 마을과 언곡, 새들마을 등 3개마을 형성되어있다.
마을의 지형적 형태가 배 모양과 비슷하다 하여 마을 안에 우물을 파면 재난이 일어났다고 전해오며, 현재까지도 선리마을에는 우물이 없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워니, 함포(含浦)(고기가 물을 머금는 포구), 내포(內浦) 안동내 포구), 어영(魚泳)(고기가 헤엄치고 노는 포구)까지 바다 물이와 닿았고,
선리마을은 선창 마을이라 하여 마을 앞에 배가 정박하였다 하는데, 왜정때 일본인들이 산수가 좋고 지형이 배같이 생긴 곳에는 큰 인물이 큰 인물이난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지명을 바꾸어 물맛이 배맛같이 좋다는 뜻으로 이천(梨川) 삼리라 개칭하였다 한다.
2. 지명 유래
1) 태봉(胎峯)〔마을〕-삼태봉 밑에 있는 마을.
2) 통도골(통도곡)〔골〕-선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 도통한 도사가 살았다 함.
3) 한피기 고개〔고개〕-한피골에서 하북면 초산리로 넘어가는 고개.
4) 다름산(월출산)〔산〕-선리 동쪽에 있는 산. 이 산 뒤로 달이 뜨므로 마을 사람들이 집에서 달맞이를 한다 함.
5) 삼태봉(三胎峯)〔산〕-태봉 서북쪽에 있는 산. 봉우리가 셋으로 되어있음.
6) 셋들(새들)〔마을〕-선리 북쪽에 있는 마을.
7) 재약골〔골〕-장선마을 북쪽에 위치한 재약골은 이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밀양 표충 사와 사자평 또는 재약산으로 가는 오솔길이 있다. 이 골짜기에는 옛날부터 한약초가 많이 생산되는 곳으로 유명하다.그래서 사람들은 재약(載藥)골이라 칭하고 있다.
8) 태봉 점터골〔골〕-태봉 북쪽의 삼태봉 아래 위치한 점터골은 옛날에 쇠를 녹였다고 하며, 현재에도 그 곳에는 쇠를 녹인 흔적이 남아 있다.
9) 배내천〔내〕-원동면으로 지나가는 배내천은 배내에서 발원하여 밀양시를 거쳐 흐르다 가 다시 본면 소재지 앞을 역류하는 냇물로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드문 역류하는 시내라 한다.
10) 태봉들〔들〕-태봉의 북쪽에 위치한 들로 이천 3개 마을에서 제일 먼저 해가 뜨는 곳 이기 때문에 곡식의 결실이 잘 되며, 서쪽으로는 삼태봉이 둘러싸고 있다.
▪《장선마을》
◎ 마을의 내력
장선(長善)마을은 원동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있으며, 약 400년전 임진왜란 당시 전국 각지 피난민들이 이주하여 와서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장선(長善)마을은 충주지씨와 경주이씨, 평택임씨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옛부터 미곡을 생산하고, 채약(採藥)으로 부업을 하며 영세목축업으로 생계를 도와왔으나, 최근에는 과학적 영농방식을 도입하여 무공해 채고재배 관광객의 민박유치 등으로 날로 발전하는 장선마을을 이루어 가고 있다.
장선마을은 원동면에서 최북단에 위치한 마을로서 당초 태봉과 도태정 등 자연마을로 흩어져 있었으나, 6.25동란 때 공비의 난동으로 전 마을이 소실, 휴전과 동시 양산, 상북, 하북, 밀양 등지에서 이주해 온 주민들로 현 장선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서룡리》
1. 마을의 내력
서룡리(西龍里)는 화제리의 서쪽에 있는 마을로 원동리와 접경하고 낙동강변에 형성되었다.
경부선 철도가 강을 따라 관통하고 1022호 도로가 지나는 곳이다.
양산군읍지에 서면 범서리(凡西里)라 칭했다. <<호구총수>>에는 주진리, 신정리, 범서리로 분할 되었다. <<양산읍지초>>에는 범서리, 신정리, 용포리로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변경 때 서룡동으로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범서마을, 신주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2. 지명 유래
1) 안탕바깥탕 : 안탕은 범서 앞을 들이고, 바깥탕은 가등제방 안을 말한다.
2) 고래 : 범서동의 가은데 마을.
3) 굴밧산,함박산 : 범서북쪽에 있는 산. 금을 케던 굴이 있음
4) 배나리,주진 : 범서동 서쪽 낙동강 가에 있는 마을, 전에 나루타가 있었음.
5) 뻘등 : 범서동 남쪽들에 있는 마을. 지대가 낮아서 비만 오면 뻘등(흙탕)물이 고여든다 함.
6) 새주막 , 신주막 : 범서동 서쪽에 있는 마을. 주막이 있었음.
7) 수청리 : 뻘등 서쪽에 있는 마을
8) 신정리 : 골쇠 남쪽에 있는 마을
9) 절텃골 : 고래 서쪽에 있는 골짜기. 절이 있었다 함.
10) 말대가리 : 주진 밖 서쪽에 솟은 봉우리
11) 대부산 : 주진골에 솟은 봉우리 (함포 뒷산)
12) 평풍바우 :대부산 봉우리를 둘러싼 병풍처럼 생긴 바위
13) 절치등 : 평풍바우 아래쪽 골짜기에 있는 옛 절터
14) 노루짓등 : 토곡산에서 굽이를 쳐서 낙동강까지 뻗어 내려온 긴 능선. 동편은 신정마을, 서편은 주진마을, 골쪽 낙동강변에는 옛날 신주막이 있었다.
▪《화제리》
1. 마을의 내력
화제리(花濟里)는 오봉산을 사이에 두고 물금읍과 경계한 마을이다.
외화(外花), 내화(內花), 지나(旨羅), 명언(明彦), 토교(土교등 5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다.
1786년에는 서면 화제리로 편성되었다가 1789년에는 외화촌, 내화촌으로 양분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때 화제동으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산읍지초(1878)>에 지보 교량편에서는 "화자포교 즉 금화교"라 하였다.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이 임경대 유람 때 작시하였다는 임경대시와 화제팔경이 있다.
2. 지명 유래
1) 갈매기제방 안 갈매기제방 안쪽에 있는 들
2) 감태봉 : 지나리 북쪽에 있는 산. 지형이 감투처럼 생겼음.
3) 경파대 : 토교동 남쪽 낙동강가에 있는 쉰질바위. 경파대라 새겨져 있는데 사인 정임교가 향토사우와 수창 하던 곳이다.
4) 골마을 : 명언 동북쪽에 있는 마을
5) 갈매기제방 : 화제 앞에 있는 둑. 일본인 '갈목'이가 막았다 함.
6) 대밭각단 , 대밭골, 죽전 : 중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 대밭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음. '각단'은 마을이란 뜻으로 쓰는 방언
7) 도덕골 : 대밭각단 서쪽에 있는 마을
8) 독점 : 명언 북쪽에 있는 마을. 독을 굽던 독점이 있었음
9) 불메골 : 새팬이 서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대장간이 있었다 함.
10) 수산물, 수삼물 : 중리 서쪽에 있는 마을. 내화, 외화 중에 으뜸 됨.
11) 토교동 : 화제리에 있는 마을
12) 사기점 :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사기그릇의 많은 흔적이 있다. 최근에 각 지방 대학에서 고고학자 교슈들이여러 차례 이곳을 탐사했다.
▪《원동리》
1. 마을의 내력
원동리(院洞里)는 경부선 철도 원동역을 관문으로 함박산(토곡산)을 등지고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원리(院里), 함포(含浦) 두 자연 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양산군 읍지(1786)》서면 면리조에는 원동리(院洞里) 함박산리(含朴山里)로 구분되었고,《양산 읍지초(1831)》하서면 면리조에는 원동리(院洞里), 함포리(含浦里)로 되었으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변경 때 원동리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지명 유래
1) 감로(甘露)나루〔나루〕-삼정지 동남쪽에서 김해군 상동면 감로리로 건너가는 나루터.
2) 삼-정지〔마을〕-원댕이 동남쪽에 있는 마을.
3) 석유방우(석이암)〔바위〕-함포동 동쪽 토곡산에 있는 바위, 석이(石珥)가 많음.
4) 신촌(新村)〔마을〕-원댕이 북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
5) 원동관 터〔터〕-현재의 고방터 집터(원리895번지)에서 낙동강을 항행하는 모든 배의 통행료를 소금으로 받다가 고종 이후에는 현물세를 받았다고 한다.
6) 원동 진〔나루〕-원댕이에 있던 나루터.
7) 천냇 들〔들〕-함포동 북쪽 냇가에 있는 들.
8) 한소 골〔골〕-함포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큰 소(沼)가 있었음.
▪《용당리》
1. 마을의 내력
용당리(龍塘里)는 천태산(天台山)으로 밀양(密陽)과 접경하고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김해(金海)와 경계로 하고있는 마을이다. 용당중리(龍塘中里), 당곡(塘谷), 신곡(新谷)등 자연 마을로 형성되었다. 마을의 형성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양산군읍지(1786)》에 서면 용당리(龍塘里)로 기록되어있고, 하서면 시대를 거쳐 1914년 행정구역 변경 때는 용당동(龍塘洞)이고, 면 소재지였다. 그 당시의 용당동은 낙동강의 가야진(伽倻津) 현재 가야진사가 있는 곳이다. 한양(서울)가는 국도가 강변을 따라 나고 운송수단이 수로로 통할 때, 바로 이곳이 하서면의 중심지였다.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신라시대 제사조(祭祀條)에 의하면 사독(四瀆)중의 하나인 황산하(낙동강 하류)에 가야진사(伽倻津祠)를 새우고 용신(龍神)에게 풍농을 기원한 제를 올린 곳이기도 하다.
신라가 가야국을 정벌할 때 이곳 나루를 건넜을 것으로 추측된다.《양산군 읍지초(1878년)》에 용당장은 매순 4, 9일 개시(龍塘場 每旬 4, 9日 開市)란 기록이 있어 당시의 번창함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용당리는 1926년 5월 면사무소를 원리로 이전하기까지는 행정과 교통의 중심지였다.
2. 지명 유래
1) 가야진〔나루〕-용당나루
2) 가야진사〔사당〕-가야진 제당.
3) 검세리〔마을〕-용당리
4) 땅골〔당곡동〕〔마을〕-비석골 동쪽에 있는 마을. 땅이 골이 졌음.
5) 비석골〔비석곡〕〔마을〕-용당리 북쪽에 있는 마을. 어귀에 비석이 서 있음.
6) 삼각산〔산〕-비석골 북쪽에 있는 산. 높이 561m. 세모졌음.
7) 신곡〔골〕-샛골
8) 신불암〔절〕-절골 입구에 있는 절.
9) 오의정터〔터〕-신불암 동북쪽에 있던 마을, 또는 정자의 터. 1969년 독가촌 이주 대책에 따라 철거되었음. 전에 오의정이란 정자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음.
10) 용소〔소〕-용당리 앞 낙동강가에 있는 소(沼)
11) 장사골〔골〕-신불암동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장사(壯士)가 살았다 함.
12) 중마(중리동,지경이)〔마을〕-용당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 밀양과 양산의 옛 경계.
13) 하주막〔마을〕-중마 서쪽에 있던 마을. 전에 주막이 있었음.
14) 옥정승묘지〔묘지〕-중리마을에서 약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가야시대의 옥정승묘소가 위치하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이 곳을 옥정승묘지라 칭하고 있다.
▪《내포리》
1. 마을의 내력
내포리(內浦里)는 배내골로 가는 길가에 위치한 마을로 내포, 선장(仙庄) 두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다.
《양산군읍지(1786)》에 서면 내포리라 기록되었다. 그 뒤 하서면 시대를 거쳐,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내포, 영포로 구분되기까지 지명과 지역이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그러나 내포리는 당시 지역의 중심지였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내포동(內浦洞)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2. 지명 유래
1) 고짓등(고지동)〔마을〕-내포 북쪽에 있는 마을. 지대가 높음.
2) 내포원터〔터〕-내포에 있는 내포원의 터.
3) 명전(明田)〔마을〕-선장 동남쪽에 있는 마을.
4) 미타암터〔터〕-절골에 있던 미타암의 터. 신라 때 세운 절로 이조 말엽에 통도사로 옮겨 갔음.
5) 바래수〔소〕-바래수보에 있는 소(沼)
6) 사자목〔목〕-안선장 동남쪽에 있는 잘록한 고개.
7) 숭촌고개〔고개〕-내포에서 삼량진읍 행곡리 숭촌으로 넘어가는 고개.
8) 어전(於田)〔마을〕-널밭.
9) 천질소〔소〕-선장과 사지목 사이에 있는 소(沼). 깊어서 명주실꾸리 하나가 들어가도 모자랐다 함. 천길→천질(지역어)
10) 하서사창터〔터〕-내포에 있던 하서사창(국가곡물창고)의 터.
11) 가매봉-사인교처럼 생긴 사지목 뒷산 봉우리.
▪《영포리》
1. 마을의 내력
영포리(泳浦里)는 내포리의 안쪽에 위치하고 배태고개를 사이에 두고 배내골과 경계하는 마을이고 영포 어영 두 마을로 형성되었다.
이곳은 신흥사(新興寺)가 있다.《양산군읍지(1786)》에 행정구역 명칭을 신흥사라 하였다. 경상남도 《양산군 읍지(국찬)(1899)》에 어포리(於浦里)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 때 영포동(泳浦洞)으로 개칭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2. 지명 유래
1) 금새미 방우〔바위〕-어포동 동남쪽에 있는 바위. 밑에 금샘이 있음.
2) 배태〔마을〕-어포동 동북쪽에 있는 마을.
3) 배태고개〔고개〕-배태에서 대리로 넘어가는 고개. 전에 배내천에 큰물이 흘렀을 때 양쪽으로 배를 대었다 함.
4) 절골〔골〕-어포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
5) 진등〔등〕-어포동 동쪽에 있는 긴 등성이.
▪ 대리
1. 마을의 내력
대리(大里)는 배내골에 있으며 대리, 고점(古店)마을로 형성되었다.
《양산군 읍지(1786)》에 서면 이천리(梨川里)로 통합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 때 대리동(大里洞) 선동(善洞)으로 분할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피난민으로 형성되었다고 전한다.《양산읍지초(梁山邑誌草)(1876)》
사창(社倉)편에 ‘외서사창 이천리에 있다(外西社倉在梨川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대리인지, 선리 인지는 알 수 없다.
2. 지명 유래
1) 고점(古店)〔마을〕-대밖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 쇠점이 있었다 함.
2) 뽈대산〔산〕-대리동 서북쪽에 있는 산.측량 때 뽈대(푯대)를 꽂았다고 함.
3) 신선바우〔바위〕-하양대 동남쪽에 있는 바위. 옛날 신선이 노닐던 바위라 한다.
4) 풍호대(風呼臺)〔대〕-대리동 서남쪽 배내천 가에 있는 대. 경치가 좋아 천은(川隱) 박 기섭(朴基燮)이 대를 쌓고 놀았다 함.
5) 선바위〔바위〕-옛날에 상북면 석계장으로 가는 길목에 이 바위가 서 있어서 짐을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방해가 되어 지나가는 사람마다 그 바위 그 바위하고 미워했다. 어느 날 석계장으로 여러 사람이 가는데 그 바위가 밤사이에 길 아래로 내려가 있어서 통행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하여 선바위라 하였다.
6) 염수봉-대리마을 앞산에 있는 봉우리인데, 옛날 초가집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을 때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므로, 염수봉 봉우리에 염수를 묻어두면, 화재를 면한다 하여, 염수를 독에 넣어서 땅밑에 묻어 둔 뒤로는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6.25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매년 1회씩 염수를 독내에 충당하기도 했다하며, 그 독은 지금도 이 곳에 묻혀있다고 한다.
▪《고점마을》
◎ 마을의 내력
고점(古店)마을은 교통상 유서깊은 마을이다. 그래서 옛 고점마을을 근거로 살펴보기로 한다.
원리에서 배태고개를 넘어면 길가에 있는 마을이며, 밀양 단장면 고에(지금은 수몰)에서 하천을 따라오면 마주치는 곳이고 언양 배내로 이어간다. 또 하양대 골짝으로 고개를 넘어면 상북 내석과 강서동 화룡마을로 통하는 네 갈래 길의 분기점 마을이었다. 지금도 비록 옛 마을은 수몰지구로 철거되었으나 교통망은 마찬가지로 네 갈래 도로의 분기점이다.
옛 고점에는 점터가 있었다고 전하며 길목의 주막촌 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피서지로서 분비고 있다.
▪《중리마을》
◎ 마을의 내력
중리(中里)마을은 대리와 장선리의 중간지점 즉, 배내골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다. 중리․새들․선곡 등 여러 자연마을로 형성되었으며 행정의 중심지역이다. 1963년 1월 5일 이천출장소가 개설되었다.
원동 중학교 분교, 상포 초등학교 분교가 있었으나 학생이 줄어서 폐교되고 일부 학생들은 버스로 원동 중, 초등학교에 통학하고 있다.
나주정씨(羅州鄭氏)씨, 청도김씨(淸道金氏), 김영김씨(金寧金氏) 등이 먼저 정착 하였다고 한다. 6․25동란 때 마을이 전소 된 적도 있으나 지금은 피서지로 개발되어 음식점 숙박시설 등 유락시설이 많이 생겼다.
▪《범서마을》
◎ 마을의 내력
범서(凡西)마을은 범서(범리), 뻘등 수청리의 셋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다. <양산군읍지(1786)>에는 서면 서룡리를 범서리라 하였다.
1789년 호구총수 양산군 편에 주진 신정 범서로 분할되었다.
오래전 부터 밀양 박씨가 정착한 박씨 집성촌이다. 그래서 범서 박씨라고도 한다.
뻘등마을은 들판 철로 변에 있는 농막 촌이다. 옛날 한양 가는 국도가 지나간 곳이기도 하다. 수청리는 물 맑은 샘이 있다고 전해오고 그래서 수청리라 하였다.
1022호 지방도가 지나고 신정리와 접경 지역이다.
▪《신주마을》
◎ 마을의 내력
신주(新注)마을은 낙동강변에 위치하고 경부선 철로와 1022호 지방도가 지나는 마을이다. 신정, 주진 두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다.
<호구총수(1789)>에는 양산군 서면 주진리 신정리로 편성되었다.
<양산읍지초(1831)>에는 신정리, 용포리, 주진을 용포(龍包)로 개칭되었다. 용포라고 한 연유는 알수 없으나 지형지세를 보면 토곡산에서 한줄기 능선이 마치 용같이 굽이쳐 낙동강까지 내려와서 주진마을을 감싸 안고있는 형태라 '살포(包)'자를 쓴 것 같으나 추측에 불과하다.
주진마을은 강변 나룻터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약 800년 전에 김해 김씨가 정착하였다고 전하며, 안주진 마을은 동래 정씨가 임진왜란을 피난한 곳이라고도 전한다. 신정마을은 신정, 새술막 두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다. 신주막은 옛 한양(서울) 가는 대로가 강변을 다라 갔을 때 주막촌이 있어 행인과 배가 쉬어갔던 곳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주막집이 있었으나 강물의 홍수로 신정 마을로 옮겨가고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외화마을》
◎ 마을의 내력
외화(外花)마을은 화제리의 바깥쪽에 위치한 마을로 화정, 죽전, 중리등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다.
마을 앞으로는 1022호 지방도가 지나가고 넓은 화제들판이펼쳐지고 있다. 일제시대에는 하천 부지에다 둑을 쌓아 갈목농장, 가등농장 등으로 착취한 곳이기도 하다. 1979년 농업용수 개발사업이 완공되면서 넓은 들판이 되었다.
화정 도덕골에는 약 200여년전 밀양 손씨가 입촌하였다고 전하고 수산물에는 밀양 박씨, 중리에는 안동 김씨 등이 먼저 입촌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중리마을에는 화제초등학교가 있다. 이 지역에는 청자를 구운 흔적이 있다.
▪《내화마을》
◎ 마을의 내력
내화(內花)마을은 화제리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호구총수(1789)>에는 양산군 서면 화제리를 외화촌, 내화촌으로 양분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 때까지 약 100여년 동안 시행하였다. 그러나 내,외화의 경계를 알 수 없어 안타깝다. <양산읍지초(1878)>에 의하면 "내서사창이 내화리에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약 300여년 전에 벽진 이씨와 상주 주씨가 입촌하였다고 전하나 벽진 이씨의 집성촌이다.
▪지나마을
◎ 마을의 내력
지나(旨羅)마을은 서편마을의 동편에 있는 마을이다. 지나, 감토봉, 독점으로 형성되었다.
약400여년전 영산 신씨, 상주 주씨, 벽진 이씨가 살다가 주씨, 이씨는 서편으로 이주하여 갔다고 전한다. 감토봉은 지나마을의 안쪽에 있는 마을로 황토가 나오는 곳이라 감토봉이라 하였고, 도자기를 구운 흔적이 있다.
독점은 큰독점, 작은독점으로 양분되었다. 큰 독점에는 영산 신씨가 입촌하여싿. 작은 독점에는 약200여년전 김녕 김씨가 정착하여 한때는 독점 김씨라 한 적도 있는 집성촌이었다.
독점에는 지명에 나타난 바와 같이 옹기굴이 있었다.
▪《명언마을》
◎ 마을의 내력
명언(明彦)마을은 오봉산을 사이에 두고 물금읍과 접경하는 마을이다.
마을의 형성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옛날 화자포시대에 포구와 같이형성되었다고 전해오며, 김해 김씨, 해주 오씨 가 먼저 입촌하였다 먼덤, 골마, 토교 등 자연마을로 형성되었으나 1991년 10월17일 토교가 분동 됨에 따라 지금은 먼덤, 골마 두마을이 되었다.
고종 임진 사헌부감찰 김천도찰방 김해인 김용태가 천석지기를 한 마을이다.
▪《토교마을》
◎ 마을의 내력
토교(土橋)마을은 낙동강과 화제천이 마주치는 포구에 위치한 마을이다. 1991년 10월17일 명언마을에서 분동되었다. 옛날에는 한양 가는 길목 주막촌이었다. 그래서 화제천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길목에 긴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녔기 때문에 토교란 지명이 붙었다고 전하고 있다. 지금은 부산 상수원 취수장과 울산 공업용수 취수장이 생긴 후로 그곳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파트가 건립되어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독립 마을이 되었다.
화제 석교비가 있다. 군수 박규환이 밀양부사 임수유와 합력하여 작원과 황산 양기도에 수치하였다는 기록과 화제석교비의 연대와 인물이 동일하므로 당시에 건립한 두 비(작원, 황산)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단지 비문이 심하게 마모되어 식별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의 유람한 임경대가 있다.
열두달 장독대아카데미(이성규대표)는 2024년 11월 8(금)부터 11월 29(금) 총 10회에 걸쳐 배내골 대리마을 산딸기 작목반을 대표하는 내리 이장과 협의 하여 교육을 진행한다.
금번 교육진행은 평상시 "배움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내리 이장 ○○○는 안중근의사 유묵을 빌어『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황금백만냥 보다 한사람을 가르치는 것보다 못하다."라고 철학적 배움에 대한 평생교육 차원에서 외부 강사를 섭외하여 진행을 하고 있다.
원동면은 동쪽으로 하북면,상북면, 서쪽으로 밀양시,남쪽으로 물금읍,김해시, 북쪽으로 울산에 접해 있으며, 8개 법정리( 원리,용당리,내포리,영포리,대리,선리,서룡리,화제리)를 관할하며, 면 소재지를 중심으로 한 10개 마을은 원동생활권,서룡리및 화제리의 7개 마을은 물금 생활권, 배내골의 5개 마을은 양산 생활권으로 3분화 되어 있다.
《교육내용》은 아래와 같다
☞ 1회차(이성규) : 11/08일(금)ㆍ오리엔테이션(Orientation)& 소개/ㆍ건강한 장내미생물 마이크로바이옴
☞ 2회차(문승희) : 11/11일(월)ㆍ산딸기 양갱
☞ 3회차(최호생) : 11/13일(수). 심오하고 신비한 오장육부이야기 무료 탈모 진단
☞ 4회차(정재복) : 11/15일(금)ㆍ핸드페인팅(나만의 도자기 만들기)
☞ 5회차(박미영) : 11/18일(월)ㆍ 몸과 마음이 행복한 음식이야기
☞ 6회차(김승수) : 11/20일(수)ㆍ재미있는 경제이야기 돈을 알아야 돈이 온다
☞ 7회차(윤영석) : 11/22일(금)ㆍ건강과인체 & 침, 뜸
☞ 8회차(정두라) : 11/25일(월)ㆍ공동체의식함양/레크레이션
☞ 9회차(김종봉) : 11/27일(수)ㆍ재미있는 세계(GLOBAL)여행 체험 및특산물 소개 사례
☞ 10회차(김미란) : 11/29일(금)ㆍ아주 쉬운 미술그리기
금번 교육은 산딸기 작목반에 농업기술센터로 부터 지원 받은 소중한 금액을 '선진지견학'이라는 여행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뜻 깊은 교육에 사용하고자 하는 이장의 현명한 생각에서 출발을 하고 있다.
"원동면 산딸기 축제를 2024.06.15(토)~16(일)1박2일로 실시하였다."고 관계자는 말했다.
장소는 원동면 원동로 2220에 위치한 쌍포매실다목적광장에서 실시하였으며, 산딸기쥬스만들기 체험과 캠크닉(캠핑+피크닉),로컬특산물판매,향토음식점 운영,시민노래자랑 행사를 실시하였다.
양산시는 2022년 농업인대학(산딸기과정) 을 운영하였다.
교육의 목적은 기초이론이 정립된 전문화된 영농기술교육으로 과학영농 실천과 경쟁력있는 미래농업으로 소득을 증대시키고 유능한 인재를 집중 교육하여 신지식 농업인을 양성하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산딸기 교육과정의 추진방향은 아래와 같다.
❍ 양산 농업의 특화 발전에 필요한 산딸기 재배기술 장기 기술교육을 실시하여 과학영농 실천능력을 갖춘 전문농업경영인 양성
❍ 전문농업분야에 대한 이론의 체계화로 지식기반 사회에 적합한 농업인력 육성하여 농산물 고부가가치 창출 및 지역농업 발전에 기여
운영개요는 아래와 같다.
❍ 근 거: 「농촌진흥법」 제19조(교육훈련사업의 실시)
❍ 사 업 비: 16,000천원(국 8,000, 시 8,000)
❍ 학사기간: 2022. 7. 19. ~ 10. 4.(총 20회, 84시간)
❍ 학사인원: 교육을 희망하는 농업인 또는 예비농업인 20 ~ 30명
❍ 학사장소: 농업기술센터, 영농 현장 등
❍ 학사내용: 산딸기 재배기술 전반(일정표 참조)
ㆍ 산딸기 재배 원리 및 모종관리, 미생물의 대사산물 발효퇴비 제조공정
ㆍ 유통 및 판매에 대한 품질관리, 판매현장 견학 등
❍ 교 육 비: 전액 지원(단, 교육생 간식비, 견학비 등 필요시 자부담)
❍ 학사방법: 이론강의, 현장실습, 토론 등의 교육방법을 적용하여 문제해결형 실천학습
《교육 추가신청 및 선정》
❍ 신청기간: 2022. 6. 15. ~ 6. 22.
❍ 추가모집인원: 10명 내외
※ 해당 과정 수요조사로 사전 교육 신청인원: 19명
❍ 신청대상
▲ 1순위: 양산시에 거주하면서 양산에서 산딸기를 재배하고 있는 농가
▲ 2순위: 관외지역에 거주하면서 양산에서 영농을 종사하고 있는 농업인 또는 예비농업인
▲ 3순위: 농업경영체 등록자
❍ 신청방법: 방문 또는 이메일접수
농업기술센터 농업기술과 기술기획팀(☎055-392-5303)에서 접수를 하였다.
학사운영 세부일정(안)은 아래와 같으며, 총 20회 84시간을 실시하였다.
아래의 사진은 낙동강변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매화꽃, 원동역을 따라 들어오는기차를 담은 한 컷, 봄을 알리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고장이다.
낙동강변의 기름진 땅과 『배내골』로부터 내려온 맑은 물,일교차가 커 농작물이 자라기 최적의 조건을 지닌 양산 원동면은 풍요로운 선비의 고장이다.
상춘객을 끌어 들였던 봄의 전령사 미나리, 꽃망울을 터트리는 매화와 향긋한딸기, 싱그러운 매실과 오디, 산딸기까지 풍성한 마을이 바로 원동면 '내리'이다.
사시사철 나는 청정한 특산물을 맛볼 수 있는 원동면은'관광형 농촌'으로 로컬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있는 고장이다.
'코로나19'로4년 만에 재개된 원동 미나리 축제가 열려 관광객의 마음을 사로 잡은 곳이 바로 원동면 이다.
아름다운 고장 원동면은 관광객들로 부터 '가고싶은 원동, 머무르고 싶은 원동'의 기억하고 싶고, 추억을 남기고 싶은 깊은 애정의 포지셔닝을 심어 주고 있다.